성경에 나오는 유대 4대 종파 중에 하나인 열심당원을 뜻하는 셀롯(Zealot)에 대해서 살펴보고, 성경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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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당의 뜻과 의미
열심당은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 4대 종교 분파 중에 하나로서, 하나님께 유일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 어떠한 정치적 저항과 무력을 사용한 반란을 일으키는 행위가 옳다고 여겼던 종파로서, 로마 호적 조사 때 갈릴리 출신 유다(Judas)를 통해 만들어졌다.
열심당(Zealot)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스타크래프트 게임에서 프로토스 종족에 있는 질럿과 스펠링이 같은 단어로서, 무조건 직진만 하는 유닛으로 알고 있듯이, 열심당이라는 단어의 뜻은 열심 있는 자, 헌신한 신자, 큰 뜻을 품은 자를 뜻한다.
이처럼 이들은 열심 당원으로서 율법을 충실하게 지키는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헌신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 젤로테스 "에서 유래되었으며, 누가복음 6장 15절에서는 셀롯(Zealot), 사도행전 1장 13절에서는 셀롯인이라고 도 표현되었다.
열심당의 근원과 결말
이렇게 셀롯이라고 부르던 열심당의 정신적 근원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와 모압 여자들과 음행으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죄악의 무게로 인해 하나님께 울부짖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 가운데, 행해지는 모압 여자와 음행 하는 범죄 현장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들의 막사에 들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창으로 꿰뚫어 죽임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멈추게 했던 것에서부터 열심당의 정신적 근원을 찾는다(민수기 12장 1-11절)
하지만, 로마의 지배가 시작되자 처음 지녔던 정신적 의미가 변질되기 시작했고, A.D 6년경 이방 민족인 로마를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갈릴리 사람 유다를 통해 무장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단체로 만들어져 활동을 했다.
이들의 열심은 하나님만을 온전한 통치자요, 왕으로 삼던 신정 정치(지배자가 자기의 권력을 신으로부터 주어진 절대적인 것이라고 하는 정치 체제)를 방해하는 모든 세력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며, 죽음까지 불사르며 싸우는 투쟁 단체였다.
이러한 열심당 셀롯은 A.D 70년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에도 그 명맥은 유지했지만, A.D 74년 마사다(Masada)에서의 최후 항전을 끝으로 셀롯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열심당을 대표하는 단어들
열심당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들로는 열성, 선민사상, 민족주의자, 민족 우월주의자, 암살자, 극단주의자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다.
먼저, 열성이라는 뜻은 어떤 것을 하거나,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엄청난 열정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도행전 23장 12절에서 사도바울을 죽이기 위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결심해 당을 지은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뜻한다.
선민사상(The chosen people)은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민족,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성경에서는 택한 백성 또는 성민(거룩한 민족)이라는 뜻으로 표기되었다.
본래 이스라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 한분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민족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길 정도로 싫어했지만, 아무리 이방인들이라도 율법을 자신들처럼 엄격히 지킬 것을 약속한 후에 할례를 받으면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서 유대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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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할례라는 단어의 뜻은 " 돌려 깎기 "라는 뜻으로 남성 성기의 표피의 끝 부분을 잘라내는 것으로, 현대의 포경 수술에 해당한다. 이것의 시작은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언약에서부터 종교적인 목적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사실 할례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세례이다.
쉽게 말하자면, 할례를 통해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겠다는 믿음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으로 할례가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흔적이라면, 세례는 신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의 흔적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자라고 여겼다.
이러한 할례 행위를 북아프리카 혹은 파푸아뉴기니 원주민 부족에서는 성인식으로 여전히 행해지기도 하며, 이것이 현대에서는 의학적인 목적으로 주로 행해지고 있다.
이런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은 다른 이방인들도 유대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음으로 인해, 혈통을 뛰어넘는 신앙 공동체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순수 아브라함의 혈통이 이스라엘의 선민인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할례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세례를 통해 구원받는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할례 또는 세례와 같은 행위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할례와 세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일까?
성경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할례는 몸에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마음 가죽을 베고 하나님께 속하라고 말했다(예레미야 4장 4절) 여기에서 할례를 마음 가죽을 베라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마음 가죽을 벤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위적인 인간의 몸의 행위를 통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가죽이라는 것이 가죽처럼 질기고 단단한 것으로 덮여있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지 혹은 죄 가운데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하는 에스겔 선지자가 말하는 메마른 뼈와 같이 영적으로 죽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에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우리의 무뎌진 마음을 도려내서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 가운데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
즉, 할례 또는 세례를 통해 무뎌진 우리의 영적인 마음을 찢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영적인 새로운 삶,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이며, 그러므로 인해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자로 살아가겠다는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포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육신적인 혈통상의 이스라엘이 아닌, 신약의 성도나 교화와 같은 민족과 혈통이 다를지라도 하나님을 구원자로 믿는 모든 영적인 이스라엘을 참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가르쳤다(로마서 9장 6절)
그래서 육체로는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지만, 누구든지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면, 우리가 영적 이스라엘로 인정받아 하나님의 약속을 이어받는 후손이요, 자녀가 된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언제나 누구에게든지 열려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성격이 어떠하든지 또는 어떤 죄를 지었던지 우리가 판단하고 그들을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그룹을 나누는 행위들을 엄연하게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삶의 변화가 없는 상태에서 받는 세례와 할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런 할례 의식이 구원의 표식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문화에서 할례 의식이 구원과 관계없다는 초대 교회 사도들의 결정에 따라 이방인이 개종할 때 행하는 할례 풍습은 사라졌다. 하지만, 일부 유대교의 구약 전통과 초기 기독교 관습이 이어져 남아있는 정교회에서는 여전히 토요일 안식일과 세례와 할례도 함께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열심당은 선민사상은 혈통으로서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여기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지옥의 땔감으로 여기며, 그들을 경멸하는 민족 우월주의자들로서 이스라엘의 국가 독립의 열렬한 지지자로서의 민족주의자들로서 무력 항쟁 단체가 되었다.
성경에 나타난 대표적인 열심 당원이었던 인물들은 예수님의 제자 가나나인 시몬(작은 야고보의 형제), 가롯 유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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