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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스토리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by khuiharley 2023. 1. 12.

요즘 시대는 말은 믿음 좋은 사람처럼 말하지만, 삶에 나타나는 말과 행동은 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하나님 사랑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흘러가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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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의미와 뜻


사랑이라는 단어의 뜻은 깊은 애정의 느낌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기독교 신학과 성경에서 빠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중심 주제 중에 하나이다. 

구약 성경에서 명사형과 동사형태로 사용되는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 아헤브 "는 성경에서 200번 넘게 사용되었다. 부모와 자녀, 부부 사이의 관계 그리고 모세 오경에서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다음으로 사랑이라는 뜻으로 많이 쓰인 히브리어 단어는 " 헤세드 "이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사랑이라는 명사로 250번 넘게 사용되었으며, KJV 성경은 자애심으로, ESV 또는 LEB 성경은 변함없는 사랑, 충성된 사랑으로 번역하였고, 개역 개정판과 일부 성경 번역본들은 70인역의 번역을 따라 자리로 번역했다. 

이 단어는 신뢰의 관계를 넘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충성을 나타내는 행동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무엘상 20장 8-9절에서 다윗은 요나단에게 이전에 한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헤세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요나단이 이르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또한 이 단어가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될 때에는 자비의 의미로 생명을 보호하고, 유지시키며, 적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으로 진노를 거두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것을 묘사할 때 이 " 헤세드 "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사야 54장 10절에는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그분의 언약의 기초가 된다. 첫 인간인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으로 인해 우리를 끊지 않으시고, 새 언약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마치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명하셔서 창녀 고멜과의 관계 속에서 고멜은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고도, 또다시 나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임신한 후에 다시 호세아 선지자에 의해서 돌아온다. 그 후에 아이를 낳으면, 또다시 남자를 찾아 떠나간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나가서 고멜 네 아내를 다시 찾아오라고 명령하신다. 

이처럼 집을 나가 바람피우러 나간 고멜의 모습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나간 우리의 모습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우리는 세상이 좋아서, 하나님을 떠났고, 사람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아서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호세아 선지자 같은 사람을 보내셔서, 우리를 다시 찾아오라고 명하신다. 

마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기꺼이 99마리의 양을 놔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우리는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늘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의 언약으로 우리를 다시 찾아오셨다.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을까?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한 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 사랑이 우리의 이웃들에게 계속해서 흘러 내 보내게 한다. 

에스겔 47장에 나오는 성전 환상을 보게 되면, 성전의 문지방에서 시작한 물이 에스겔 선지자의 발목과 무릎, 허리를 덮은 후에는 그 물이 가득해서 헤엄칠만한 강으로, 사람이 감히 건너지 못하는 강이 되었다. 

이 강이 이르는 곳곳마다 고기가 각 종류대로 큰 바다의 고기 같이 많아지고, 강 좌우에는 과실나무가 자라,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고, 그 물이 성소를 통해서 나오는데, 그 열매는 먹을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 닿는 곳들마다 생명들이 살아났다. 

구약의 시대에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었다면, 신약의 시대의 성전은 성도 된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라고 표현한다.(고린도 전서 3장 16절) 이처럼 성전 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성전 된 우리가 믿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세상 속에 하나님의 생명의 물인 십자가의 사랑을 세상으로 흘러 내보내야 하는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늘 가르친다. 십자가의 사건은 위아래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관계 회복이며, 양 옆으로 수평적으로는 이웃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또한 십계명의 1-4 계명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5-10 계명은 우리의 이웃을 향한 것이었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 목숨을 다해, 우리의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또한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향해 박해하는 자들을 향해 기도하라고 하시며,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성경은 말한다.(마태복음 5장 44절)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를 통해 우리의 이웃들에게 흘러가야만 한다. 이 사랑이 흐르지 않는 신앙은 고립된 신앙이며, 말뿐인 신앙, 썩은 신앙이 된다. 그 신앙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신앙을 야고보 사도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비록 우리가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행함이 없다라면, 마치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야고보 사도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말하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고 말한다.(야고보서 2장 21절)

이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친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과 반대되는 의미가 아니다.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믿음으로 영접할 때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장 21절) 참된 신앙, 참된 믿음, 참된 소망에는 반드시 아버지의 뜻인 십자가 사랑이라는 실천이 세상에 드러나야 한다라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교회의 봉사, 섬김과 같은 교회 신앙 활동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든지, 기도를 열심히 하거나,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해야만이 신앙과 믿음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참된 신앙은 만약 우리가 믿음이 있다고 한다면, 행함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표적이 우리의 삶을 통해 위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며, 양옆으로 내 이웃을 향해서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아무리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된다. 모든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모든 비밀을 알고, 신비한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과 능력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씀한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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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우리는 교회를 떠날까?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서 교회를 떠날까? 요한일서 4장 7-11절에서 그 대답을 알려준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난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드러났으니, 곧 하나님이 자기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로 말미암아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원수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 같이 있기 때문에, 꼴 보기 싫어서 나가는 것이다. 또는 누군가 새로운 성도가 열심 봉사 충성함으로 인해, 목사님의 사랑을 독차지할 때, 자신의 존재감은 뒤로 밀려나는 기분에 미움과 질투가 가득해지고, 하는 일마다 부딪치게 된다. 

이 갈등이 심해지면, 교회 안에서 서로 원수가 되어, 당파를 나누게 된다. 이렇게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사람 때문에 교회를 떠난다. 이처럼 사람의 사랑은 오래가지 않으며, 쉽게 변질된다. 

마치 신혼부부가 처음 몇 년간은 풋풋하지만, 3년만 지나도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처럼 인간의 사랑은 변한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혹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느끼고 있는 사랑이 감정이나 사람으로부터 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난 것인지 점검해 봐야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받고, 사람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난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며,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랑은 영원하다. 세상의 끝에는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폐하지만, 사랑은 언제나 떨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다. 

우리와 하나님과 의 관계는 아담의 범죄 이후 원수의 관계였다. 하나님의 자녀에서 사탄의 자녀로, 사탄을 따르는 자로 아버지를 바꾸고, 호적까지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식을 좋아할 만한 아버지가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이며 죄인 된 우리에게 먼저 다가오셔서 먼저 사랑을 고백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의 하나뿐이 아들 독생자를 십자가에 기꺼이 내어 주셨다. 이러한 사랑이 자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다. 강요나 압박이 아닌, 내 안에 있는 그분의 영원토록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인해, 그 사랑을 나타내는 삶을 살게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며, 이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세상은 우리를 향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한다. 

다시 한번 기억하자. 믿음과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신앙의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리 좋은 은사와 천국 지옥 경험과 성령불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울리는 징과 같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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